Day 26

삶의 기준 (마 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수님은 천국은 혼인잔치와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근데 그냥 혼인잔치가 아니라,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베풀어주는 혼인잔치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음식이 준비가 되었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위해서 수고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려고 종들을 보내었는데, 사람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하러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생각만해도 제가 더욱 속상할 것 같습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청첩장을 나눠주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자니 괜히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고, 또 안 주자니 상대방이 섭섭해할 것 같고, 인간관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근데 만약 이렇게 어렵게 고민해서 결혼식에 초대를 했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일 하러 가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속상했을 것 같습니다.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들은 혼인잔치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도 그들의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준은 어떤 판단을 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기준이 없는 사람은 그때 그때 기분에 맞춰서 판단을 하게 되고, 잘못된 기준을 가진 사람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고, 제대로 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여야합니다. 다른 어떤 그럴싸한 기준들도 다 흔들리고 변해가지만, 흔들리지 아니하는 영원한 진리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기준이었다면 그들은 모두 천국잔치에서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기준이 예수님 이외의 것들인 자녀이거나, 좋은 직장이거나, 좋은 인간관계였다면, 우리도 천국잔치에 못들어가고 슬피 울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다른 것으로 우리 삶의 기준을 삼으면, 우리는 생수이신 예수님을 떠나서 우리 스스로의 웅덩이 안의 썩어가는 물을 마시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순절 스물여섯번 째 날에는 우리의 삶의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